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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由布阮)온천의 특색 있는 관광마을 만들기080703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09-09-29
유후인(由布阮)온천의 특색 있는 관광마을 만들기080703 기본정보
대륙 아시아 일본
출처
키워드
등록일 2009-09-29 11:08:33
최종수정일 2024-05-10 13:57:19
 

일본 규슈 오이타현(大分縣)의 시골 온천지였던 유후인(由布院)은 단체 관광객 전용의 대형 숙박시설이나 오락시설 없이 약 40년간 지속적으로 온천, 스포츠, 예술문화, 자연환경을 정비하여 인구 12,000명의 농촌마을에 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즐겨 찾는 유명 관광지로 성장했다.


 관광산업은 기발한 아이디어 싸움으로 창의적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관광객들은 식상해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명한 축제라도 먹거리 장터, 노래자랑, 아가씨 선발대회 등 획일적이고 식상한 초보적인  유형들로만 이루어진다면 관광객들은  외면하며 다시 찾지 않는다는 현실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1. 지역  

  유후시의 유후인은 오이타현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로 8㎞, 남북으로 22㎞로 면적은 약 128㎢이다. 분고후지(豊後富士)라고 불려지는 명산인 유후다케(由布岳1,584m)를 비롯하여 1,000m급의 산들이 많다.


  마을의 북단에 위치하는 츠카하라(塚原) 고원에는 츠카하라 온천이 있다. 표고 약 800m에 위치한 비탕은 철 함유량 일본 1위, 산성도 2위의 유산염천으로 옛부터 피부병예 약효가 있다고 하여 아토피성 피부염 등의 고객이 끊이질 않는다. 의사들이 추천하는 기적의 온천인 일본 3대 약탕으로 소개되고 있다.


  마을의 서단에는 유노히라(場l平) 온천이 있다. 가마쿠라 시대(1200 년경)부터 시작되어 천하의 유명 온천으로 명성을 누렸다. 돌층계를 중심으로 한 풍경과 인정에 방랑 시인인「다네다 산토카」도 많은 시조를 남기고 있다. 온천물은 특히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동쪽으로는 꾸사츠, 서쪽에는 유노히라라고 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온천지역사람들의 옛 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이 계승되어져 「유노히라 온천축제」등에서 그것들을 엿볼 수 있다.


  유후인 온천(유후인 분지)은 마을의 중심에 있어, 분지 중심부의 유후인 역에서 표고 450m로 여름에는 시원한 반면, 겨울에는 적설량이 많아 한 해에도 몇 번은 거리가 눈으로 뒤덮여 얼음의 나라가 된다.


  온천의 온도는 45C에서 98℃로 높고, 용출량은 42,000ℓ(분)으로 풍부하여, 벳부 온천에 이어 전국 제2위를 자랑한다. 분지내의 어디를 파도 온천이 나와 대부분의 일반 가정에서 사용되는 생활 온수도 온천이며, 자연의 이로움과 함께 천혜의 풍부함을 향유하고 있다.


2. 역사


  태고 시대에 유후인 분지는 호수였다고 한다. 보우링(온천작업을 위해 구멍을 파는 것)작업으로 인하여 지하 깊은 곳에서 목편이 나오거나, 고목이 분지 주변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분고 풍토기(약 1300년전)에는「유부의 고향」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라시대에는 납세를 위한 곡창인「원」설치되어 있어 유부원이라고 칭하여졌으며,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이 땅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것을 전해주는 묘비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3. 1960년경


  1960년경 유후인은 각 지역에 공동 욕탕이 산재하고 있는「한촌」이었다. 1952년 한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유명해 진 계기가 유후인 분지 댐 계획이었다. 표고 550m 이하는 수몰, 관공서나 유후인 역 등의 마을 중심부는 수심 100m의 호수로 가라앉을 계획이었다. 찬반양론이 마을을 어수선하게 하는 중에서도 반대 운동의 중심이 되어「유후인」의 기초를 다진 것이 젊은 청년단장이며, 초대 유후인 마을 회장인 岩男額一씨였다.


4. 1960년경의 산업의 개황


  (1) 농업

  당시의 기간 산업은 농업이었으나, 물이 냉하고 배수가 나쁘며 장마 때에는 침수되고 호수였기 때문에 연약해진 지반, 논 안에 대나무 장대를 타고 가슴까지 잠기면서 모심기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분지 특유의 일조 시간이 짧은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벼농사였다. 10아르(100평방미터)당의 수확량은 평균 480kg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2) 관광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겨우 수십 채의 시골티가 나는 여관이 자그마하게 영업해 나가는, 숙박자수는 연간 수만명 정도의 빈약한 관광 상황이었다, 온천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 용출이 주였으며, 용출 지구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1964년 큐슈 횡단도로가 전선 개통됨으로 인하여, 유입 인구가 대폭적으로 늘어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유후인 관광산업에서 빛이 보인 것은 이 때부터였다


  (3) 기타

  이렇다 할 산업도 내세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아직도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한촌이었다.


5. 유후인의 지역특성


  (1) 전형적인 분지

  지형적으로 타 지역과 격리된 공간에 인구 12,000명 정도가 생활하기에 적정한 공간과 적당한 인구가 지역적 연대감을 형성하여「지역 만들기」를 용이하게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동네의 어디에서라도 유후봉을 바라볼 수 있으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언제라도 알 수 있다는 안심감과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푸근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2) 풍부한 온천

  온천수는 단순천이며, 용출량은 42,000ℓ/분, 일본에서 2위의 풍부한 용출량을 자랑하고 있다. 원천수 838 개소의 대부분이 개인 소유이며, 많은 가정의 생활 온수는 온천수가 이용되고 있다, 온천법에서는 온도가 25℃ 이상이면 온천이라고 정의되나, 유후인은 여류롭게도 40℃ 미만의 온천은 이용가치가 적다고 보고 있다.


  (3) 풍부한 자연

  명산인 유후봉에서 이어지는 1,000급의 산들에 둘러싸여 채초 방목지에는 분고소가 풀울 먹고, 계단식 밭에는 이나와라 코즈미가 화창한 전원 풍경을 자아내어 일본의 전원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당시의 관광형태

  여행 형태는 직장 등의 단체여행이 주였으며, 당시의 관광지는 뛰어난 대자연이나 명소, 그리고 고적지로, 온천지에서는 환락가가 필수조건이었다. 관광객들은 차례차례로 이들 명소들을 둘러보고 밤에는 대연회를 여는 것이 관광의 주류였다.


  관광지 만들기 유후인에는 명소나 고적지, 그리고 환락가가 없는 가운데에서 벳부 온천같은 관광지를 목표로 하여도 모방은 하지 않는다. 장래적인 전망에서 건강하고, 젊은 여성이 혼자서라도 안심하고 방문할 수 있는 관광지 만들기를 목표로 한 것이다. 생활형 관광지인 유후인에서는「살기 좋은 마을이야말로 뛰어난 관광지」라는 컨셉이 만들어 졌다.


  (1) 생활기반의 정비

   1955년 유후인 마을과 유노히라 마을이 합병하여 새로「유후인 쵸(마을)」 가 탄생하였다, 이제 겨우 36세의 초대 유후인정장(町長)으로 취임한 岩男씨는, 「산업. 온천, 자연의 산야가 다이나믹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마을 만들기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유후인 분지는 배수가 나쁘고 습기가 많음으로 인해 병이 만연하거나, 장마 때마다 농지가 침수되어 농업 진흥을 위해 기반 정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1960년부터 일미 보상 사업에 의한 대규모 하천 개수 공사 등을 실시하였다.


  (2) 자연과 경관 보호

  ① 1970년 유후인 마을의 입구인 벳부시 이노시시 세토에 골프장이 생기려고 했을 때, 다습 초원 식물의 보고인 이 지역을 지키자고, 주민의 자주 조직인「유후인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를 결성,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호소해 이를 저지하였다.

  ② 1973년 히가시 이시마초의 고원「오도기노」에 큐슈자연동물공원 아프리칸ㆍ사파리의 건설계획이 거론되었다. 교통 엑세스나 자연 경관의 손실, 그리고 수질오염의 문제 등으로 반대 운동이 전개되어 결과적으로 현재의 아지무마치에 건설되게 되었다.

  ③ 1985년 유후인 마을의 어떤 여관 옥상에 자유의 여신상이 건립되고 있었다.

     유후인의 경관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민운동이 전개되어  결국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④ 1994년 오다의 연못 습지 지역이 개발되려 하였을 때, 유후인은 귀중한 다습 초원식물의 보고이기 때문에 유후인쵸와 오이타현이 6.5ha를 4억엔에 구입하여 이를 보호하였다.

  ⑤ 2001년 오이타 자동차도의 건설에 있어, 고속도로 교각의 배색은 붉은색이 표준이었지만, 유후인 분지로부터 붉은 색이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로 일본 도로 공단에 요청하여 녹색으로 교체하였다.

  ⑥ 명소 고적이나 환락가가 없는 새로운 관광지에 있어서 조용한 공간이나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경관의 창조는 필수불가결하며, 초원이나 전원 풍경의 보호와 더불어 건물에서부터 표식 마크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여 2000년에「마을의 풍경을 만든다」를 작성하여 지표를 만들었다.


  (3) 안심할 수 있는 관광지 만들기


  1970년 폭력단의 출소 축하 파티가 동네 여관에서 개최되는 것을 안 한 주민은 모든 상점의 셔터를 내려「폭력 반대」에 강한 의사 표시를 실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큐슈의 시골 마을이 처음으로 전국지에 게재되어 어필되었음과 동시에「마을 만들기의 방향성 확인」과 주민에게「주민들의 힘의 확실함과 자신」을 갖게 한 큰 사건이 되었다.


  (4) 새로운 온천이용의 본연의 자세를 모색


  1971년에 岩男 촌장과 젊은 여관 경영자들이 유럽을 방문하여 독일의 쿠와하우스의 상황을 견문한 후, 이상적인 휴양 온천지 쿠와오르트(독일의 바덴바일러) 구상이 거론되었다. 이 구상은 단지 관광마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천ㆍ스포츠ㆍ예술ㆍ문화ㆍ자연 경관 등을 정돈하여 주민 본위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으며, 침착한 자세로「주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마을이야말로, 뛰어난 관광지」라는 생각을 확립하여, 이후의 마을 만들기의 컨셉이 되었다.


○ 오이타현 중부지진의 발생과 문화 이벤트의 개최


  1975년 4월에 발생한 오이타현 중부 지진을 통하여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마을 중심부로부터 약 14km 떨어진 야마시타 호반의 쿠쥬 레이크 사이드 호텔의 침몰 영상이 전국에 방영됨으로서 유후인은 끝났으며, 더 이상 회복할 수없다는 풍문이 만연하였다. 이러한 위기감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것이 「마차의 운행」과 「유후인 음악제 개최」「소고기 먹고 절규하기 대회 개최」「유후인 영화제 개최」이며, 이 후 「문화 기록영화제 개최」등의 문화적 이벤트가 있었다.


  이러한 이벤트 정보는 전국으로 보내져「문화적인 지역 이미지를 어필」하게 됨으로 인해, 금후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연결되게 되였다.  현재 이 작은 마을에는 자연 발생적으로 30채의 미술관이 차례차례로 지어졌다. 이것도 문화적인 지역이미지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 마차의 운행


  1975년 7월, 유후인 괴멸설을 날려 버리려고, 대마도까지 가서 몸집이 작은 다이슈 우마를 구입하였다. 자동차 정비 공장을 하는 주민이 수제품 마차를, 여관을 경영하는 주민이 마부가 되어 주민들의 창의적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 마차의 운행이다. 유후인이 고집스럽게 지켜낸 자연 경관과 전원 풍경의 유지, 완만한 시간 흐름의 창조와 체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 유후인 음악제 개최


  1975년 7월, 제1회 유후인 음악제가「밤하늘 아래의 작은 콘서트」로서 개최되었다. 출연자와 청중이 같은 T셔츠를 입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일체감과 청중과 음악가와의 교류회 개최 등 무엇보다도 유후인의 대자연을 무대로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회로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또한, 많은 음악가들로부터「상업적이 아닌 수제품적인 음악제가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올해로 33회을 맞이하였다.


  (3) 유후인 영화제 개최


  1976년 8월, 「영화관 하나 없는 마을. 그러나 그곳에 영화가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후인 영화제가 개최되어 평상시 만날 수 없는 영화 스타와의 대화나 영화관계자들의 비화들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독의 영화 제작의 의도 등을 직접 물을 수 있는 것 등이 큰 호평을 얻고 있다. 전야제는 유후인 역전 광장의 노천극장에서 개최되어 일본 영화계의 빅 이벤트로서 올해로 32회를 맞이한다.


  (4) 쇠고기 먹고 절규하기 대회의 개최


  유후인의 초원은 옛부터 채초 방목지로서 이용되어 왔다. 기계화 등의 영향으로 소의 사육 농가수와 인원수가 감소하는 가운데, 「초원은 큰 관광자산」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보존을 위해서는 소의 존재가 필수불가결 하였다. 도회지의 사람이 자금(20만엔)을 제공하여 농가가 소를 구입하여 사육하는「소 한마리 목장운동」이 전개되었다.


  1975년 10월, 소의 오너와 사육 농가가 함께 소고기 전골요리를 먹고 교류하며, 초원에서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고함으로 치게 된 것이 대회의 시작이다. 유후인 태생으로 유후인 특산의「유후인 소」를 초원에서 구워 먹으며, 크게 절규하는 이 행사는 유쾌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풍자한 절규 등은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올해로 33회를 맞는다.


○「윤택한 마을 만들기 조례」의 제정


  유후인쵸도 1988년경부터 리조트 개발의 물결에 휩싸였다. 외부로부터의 대형 자본은 무계획적인 개발과 자연환경의 파괴, 무질서하게 경관을 해쳐 마을 만들기의 주체성을 주민들로부터 빼앗으려 하였다. 농지의 10아르 당 1억엔이 넘는 고액 매매가 잇따라, 농민들의 경작 의욕마저도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1990년에 제정된「성장의 관리」를 이념으로 하는「윤택한 마을 만들기 조례」는 일정 이상의 면적이나 높이 등의 개발 행위에 대하여 사전협의를 요구해 마을 만들기 심의회의 심의 등에서, 이 마을이「오늘에 이르기까지 만들어 온 마을 만들기의 컨셉」을 존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 관광시설의 정비


  (1) 건강온천관


  1991년 쿠와오르토 구상의 핵심이 되는 건강 온천관이 10가지종류의 입욕시설을 준비하여 개관하였다. 당초 토지 신탁 방식으로 운영을 실시하였지만 현재는 행정에 의해 관광객이나 주민들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2) 유후인 역


  1991년 유후인 역의 개축과 더불어 JR 큐슈와 협의를 통해 오이타 출신의 이소자키(磯崎)씨의 설계에 의한 역사는, 전체가 검은 색으로 홀이 위로 뻥 뚫려있으며, 개찰구에 더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합실에 갤러리를 설치하여 문화의 향기가 나는 마을 현관으로서의 정취를 잘 나타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앞으로의 과제


  (1) 전국 체인점의 대량유입에 따른 폐해


  1991년 이후, 대형 개발은 감소했지만 개발 행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소규모 외부 자본의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 상거래나 시설 건설에 있어 독자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관광 협회나 여관조합, 그리고 상공회 등에도 가입하지 않음으로 인해 「유후인」으로서의 통일성과 지역 아이덴티티가 없어지려 하고 있다.


  (2) 체재형 관광으로의 대처


  관광 형태가 관광지순회로부터, 체재형으로 변화된 지 오래되었다. 유후인의 종합적인 체재 만족 일수는 2일로 추계되고 있다. 이 2일을 「관광 자원의 발굴」「식문화의 축적」「체험 장소의 창조」「산책 공간의 확대」「광역 관광의 연계」등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3) 관광국제화에 따른 대처


  큐슈의 해외 관광객들에 따른 대응은 큐슈 7개현이 각각 관광 자원을 어필하고 있는 홋카이도와 관동, 그리고 관서에 비해 국제화에 크게 뒤쳐지고 있다. 재작년부터 큐슈관광 추진기구가 발족하여 큐슈로서의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


  유후인은 작년부터 해외(한국, 대만, 중국, 홍콩)의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으며, 그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해외 관광객은 양극화되어 있어, 대부분은 대형 버스를 이용한 투어객이며, 1~2시간 정도의 산책만을 하고 숙박지로 향한다. 느긋하게 둘러본다면 유후인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이 부분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유후인에 머무는 소수는 숙박을 겸한 부유층이며, 지역에의 경제효과를 감안한다면 해외시장에의 어필은 이러한 부유층을 타깃으로 어떻게 하여야 할지가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관광 안내도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를 준비하고 있다.


  (4) 지역내 이업종간의 경제교류


  전국적으로 지역 상점이나 상가가 소멸하고 있다. 유후인도 이러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유후인내에는 관광 관련시장이 연간 300억엔이라는 큰 시장이 있다.


  관광 관련업과 지역내 상점 등이 더욱더 긴밀하게 경제 교류를 도모할 수 있다면, 경제 효과는 400억엔도 500억엔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이 운명 공동체라는 상호이해와 단가, 다양한 상품, 편리성, 계획성, 기술성, 선견성 등 많은 장애물들을 서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생선가게, 정육점, 채소가게, 의료품점, 세탁소,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관광 관련 산업과 경제적으로도 친밀하게 연결됨으로서 지역의 호스피탈리티(환대)를 높여 고객유치의 증진과 지역의 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노점포란 모래된 전통을 계승하면서ㆍㆍ 「그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살아남은 것」이라고 정의된다. 유후인은 오늘까지 50년에 걸쳐 구축해 온 마을 만들기의 컨셉을 완고하게 지켜나가면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여 향후에도 지역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혜와 노력을 더불어 투자를 계속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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