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의 피렌체, 16세기 초 로마에 이어 16세기 중엽에 서양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은 '베네치아'다. 이곳에서 안정적인 구도와 꼼꼼한 세부, 매끈한 마무리가 특징인 15세기 회화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른 16세기적 미술, 즉 활기 넘치는 혁신적인 구성과 색채와 붓 자국이 살아 있는 '회화적인 회화(Painterly Painting)'로의 이행을 확실히 보여주고, 이후 서양 회화의 기본 매체가 되는 '캔버스에 유화' 기법을 개척한 '회화의 군주'가 바로 티치아노다.

영어권에서 티션(Titian)이라고 부르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년경~1576년)는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 경계 사이의 산악 지역에 있는 마을 피에베 디 카도레(Pieve di Cado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화가가 살아 있었던 1557년에 쓰인 돌체(Lodovico Dolce)의 '아레티노 혹은 회화의 대화(L'Aretino ovvero Dialogo della Pittura)'를 시작으로 많은 기록이 남아 있으나, 출생년이 정확하지 않다. 화가 본인도 상황에 따라 다른 정보를 제공했다. 1477년에 태어나 죽을 때 나이가 99세였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1485년에서 149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00년경 고향을 떠나 베네치아에 온 티치아노는 모자이크 장인 세바스티아노 주카토(Sebastiano Zuccato)의 도제 생활로 화가 수업을 시작해, 베네치아 회화를 이끌던 화가들인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를 차례로 스승으로 삼았다. 벨리니 형제 외에 초기 티치아노 화풍 형성에 큰 영향을 준 화가는 당시 주목받던 신예 지오르지오네(Giorgione)였다. 1510년, 베네치아에 전염병이 돌아 삼십 대 초반이던 지오르지오네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는 파도바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스쿠올라 델 산토(Scuola del Santo)에 프레스코화를 남겼다. 1514년에는 베네치아에 자신의 작업장을 만들고 독립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찬란한 빛이 된 색채

1516년에 사망한 지오반니 벨리니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의 대표 화가로 떠오른 티치아노 최초의 야심작이자 그의 이름을 도시 안팎에 알린 그림이,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의 동쪽 끝(Apse)에 1518년 설치된 베네치아 최대의 제단화 <성모의 승천(Assunta)>이다.

높이 7미터에 가까운 화면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가운데는 승천하는 성모, 아래는 이 사건의 증인이 되었던 사도들, 위에는 성모를 맞이하는 성부가 자리하고 있다. 사도들의 근육질 인체는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키고, 성모의 이상화된 용모는 라파엘로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으나, 초자연적인 존재로 보이는 성부의 모습과 이 세 부분의 화면에 통일성을 부여해 전체 화면을 통제한 것은 티치아노만의 재능이다.

팔을 중심으로 한 인물의 '동작'은 상승하는 운동감을 만들어 상중하 화면을 연결하고 있다. 세 부분을 결합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붉은 '색'이다. 티치아노의 색이자 베네치아의 색이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롭고 생기 있게 빛나는 깊은 빨간색이 두 사도의 옷, 성모의 옷, 성부의 망토로 시선을 연결하고 있다. 전체 화면에 통일감을 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남았는데 그것은 성모와 성부 사이에서 시작되어 그림 전체를 비추고 있는 황금색 '빛'이다.

이전 시기 그림처럼 금박 후광을 두른 인물이 없는데도 그림 속 사건을 신성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찬란한 빛의 묘사이다. 이 그림 좌우와 위에는 고딕식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실제 햇빛이 들어오는데, 그 빛이 그림 뒤에서도 들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주문한 성직자들이 처음에 약간 부담스러워했을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이었던 이 그림은, 벨리니와 지오르지오네의 작품을 순식간에 구식으로 보이게 만들면서 새로운 시대, 티치아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세계를 무대로

티치아노는 그 활동 범위가 나라 밖에까지 뻗쳤던 최초의 국제적 화가이기도 했다. 작업은 주로 베네치아에서 했지만 그가 만나고 작품 주문을 받은 사람은 인근 도시 국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는 라파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후원자들의 취향과 요구를 반영하면서도 다채로운 기법을 사용해서 그만의 새로운 회화 영역을 개척해갔다. 페라라 공작 알퐁소 데스테(Alfonso Ⅰ d'Este)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비너스의 경배>,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안드로스인의 주신제>는 자연을 배경으로 고전 신화 속 인물들을 '힘이 넘치는 신화화' 안에 다시 살려냈다.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Francesco Maria Ⅰ della Rovere)에 이어 티치아노의 후원자가 된 그의 아들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Guidobaldo Ⅱ della Rovere)가 구입한 누워있는 여성 누드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유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투명하고 사실적인 피부 표현, 관능적인 포즈와 시선으로 에로틱 아트의 이정표가 되었다.

<성모자와 성 카타리나(토끼의 성모)>는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곤자가(Federico Ⅱ Gonzaga)의 소장품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순교한 성인 카타리나가 그녀의 상징물인 못 박힌 수레바퀴에 무릎을 얹고 성모자와 함께 초원에 나와 있다. 성모의 왼손 아래 토끼는 순수하고 겸손한 마리아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목동은 그냥 목동일 수도 있고 요셉이나 세례 요한일 수도 있는데, 그의 용모는 후원자인 페데리코 곤자가의 초상과 아주 유사하다. 성모의 모습은 1530년에 사망한 화가의 아내 체칠리아(Cecilia)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성모자와 성인이 함께 등장하는 도상인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 주제로 그려진 이전 화가들의 그림에 비해 격식이 없어진 구성이 특징이다. 비슷한 주제로 그의 스승 지오반니 벨리니가 그린 <초원의 성모자>에서 보이는 좌우대칭 구도와 비교해도 이 작품의 자연스러운 활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인물들은 높은 지평선 때문에 풍경 속에 푹 잠긴 듯한데, 풍경과 인물의 일체감은 깊고 부드러운 색상의 조화로 인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티치아노가 그린 하늘에는 황혼빛이 비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가 보색 대비를 즐겨 사용한 것과 연관이 있다. 마리아의 붉은 의상이 초원의 녹색 위에서 더 따뜻하게 빛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보색 관계인 하늘색과 주황색이 서로를 더 돋보이게 하면서 화면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티치아노의 회화는 1550년경 이후 베네치아 미술을 이끌던 틴토레토, 베로네제 와 그 이후의 화가들에게 베네치아적인 것(Venezianita)의 바탕으로 남았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회화의 대표가 아니라 베네치아 회화 그 자체였다. 세계로 퍼진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 남긴 영향은 일일이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다. 서양미술사에서 영향력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화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오늘날에도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작업하며 그 표현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모든 화가들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티치아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협조 : 네이버(글 김진희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