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지역의 새로운 변화와 이해

글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중동정치학)

 

1. 한국과 중동

‘중동’ (中東, Middle East) 은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등의 레반트 (샴) 지역과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이란과 터키를 잇는 광활한 지역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으며 지중해를 끼고 고래로 유럽과의 교역과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져 왔다. 유목문화와 이슬람 등은 아직 우리에게는 일견 생소하고 서름서름하다. 그러나 고대 문명의 요람으로 오랜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곳도 바로 중동이었다.

 

우리와 중동 역시 오랜 교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용의 설화는 그저 옛이야기로 친다고 하자. 하지만 실제로 신라와 고려시대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당(唐)을 거쳐 한반도까지 진출했던 기록은 도처에 있다. 당시 아라비아와 한반도를 잇는 그 긴 해상 실크로드는 곧 아시아 대륙의 끝과 끝을 잇는 교류의 비단길이었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페르시아 서사 ‘쿠쉬나메’는 천년 전 한국과 중동간의 교류 그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비단 오래 전 역사뿐만 아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중동의 뜨거운 모래 (熱砂) 위에 발을 디디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카이바-알울라 고속도로 건설을 필두로 70년대와 80년대 초, 내 아버지 세대들은 그리운 가족을 고국에 두고 50도에 육박하는 사막에 이삼십대의 청춘을 쏟았다. 그리고 그 땀과 눈물은 곧 가계를 살리고 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다. 더불어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끈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는 중동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때론 오일쇼크도 있었지만, 중동의 석유공급 없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산업화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또 어떤가. 이젠 우리 근로자들이 70년대 맨주먹 쥐고 사막에서 모래 다져가며 일하고, 바다 준설하며 항만을 건설하던 시대가 아니다. 이제 우리 기업들은 중동 각처에서 주 계약자 (contractor)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근로자들이 땀을 흘리며 열사의 사막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대규모 건설공사를 직접 책임지고 있다. 건설 플랜트 각 분야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수주실적을 자랑한다. 건설플랜트뿐 아니다. 우리 기업이 생산하는 스마트폰과 자동차 및 백색가전 등 다양한 상품의 전략적 수출시장이 된지 오래다. 한편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석유 수입의 82%를 걸프지역에서 들여올 만큼 중동은 우리 산업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만큼 중동은 비록 생경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협력과 교류의 역사가 늘 상존해 왔고 지금 역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2. 변화의 기로에 선 중동, 특히 걸프지역

그런데 이 중동지역이 최근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은 온통 비극적 상황뿐이다.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는 아랍 정치변동은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고 독재자의 빈자리는 이제 극도의 혼돈으로 채워지고 있다. 무정부 상태의 리비아, 군부가 복귀한 이집트, 혼돈을 거듭하는 예멘 그리고 20만 가까운 시민이 희생된 시리아 등은 비극 그 자체다. 20세기 가장 만성적 갈등이라 여겨졌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21세기에도 지속된다. 하루도 총성과 포연이 그칠 날이 없는 곳이 바로 중동이다.

 

급기야는 알카에다보다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집단인 ‘이슬람국가’ (IS)가 이라크와 시리아를 누비며 중세적 잔인 무도함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인 종군기자 제임스 폴리의 비극적 참수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폭격으로 인한 희생, 수도 셀 수 없는 많은 난민, 불안한 미래 등이 겹쳐지며, 우리 한국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닫기 발판이었던 중동은 이제 극도의 불안정 상태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중동은 더 이상 과거 역사책에서만 보여지던 변화 없는 정태적인 중동이 아니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정세에 던져진 곳이다. 내달, 내년의 중동정치질서를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매일같이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이라도 자유를 얻기 위해, 비참한 삶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중동 도처에서 사람들은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지역 왕정국가들은 안팎의 위협을 바라보면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석유 캐서 팔아 막대한 부를 향유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음을 목도하고 있다. 이집트, 리비아 등 기존 아랍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혼란을 겪기 시작했고, 이러한 혁명의 열풍은 언제라도 왕정국가들에 상륙할 수 있다. 결국 왕정국가들은 국민들을 다독이고, 불만세력을 위무하기 위해 국가개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신도시도 짓고, 과학기술 첨단 산업단지 및 대학을 건설하고, 국가를 상징하는 거대한 첨탑빌딩도 발주하고 있다. 특히 물 부족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담수화 플랜트 등 프로젝트도 연이어 시장에 나오고 있다. 한국에게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3. 한국과 걸프 아랍, 지방정부간 미래 협력의 비전

70년대 한국은 중동에서 철저한 ‘을’이었다. 심지어는 석유를 사오는 구매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판매자 우위의 시장이었기에 늘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조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러나 2014년 오늘은 사뭇 다르다.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윈윈하는 협력이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동국가, 특히 걸프 산유국은 국가개조 프로젝트에 전념하면서 한국의 성장 신화를 도입하고 싶어한다. 작은 반도국가가 어떻게 석유 한 방울 없는 상태에서 국가의 산업을 일으켰는가에 관한 궁금증이 많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도입, 응용해보려 하고 있다. 중동의 역사를 어둡게 만들었던 유럽 열강의 식민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아시아, 특히 정치적 부담이 거의 없는 한국과의 협력은 현재 중동 각국에게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다.

 

그렇다면 우리 지방자치단체는 중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에너지 및 거대 건설플랜트가 주 진출시장이라면 지방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걸프 산유국은 유목민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족단위의 정체성이 매우 강하며, 각 유력 부족들 별로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영역이 획정되어 있다. 정치 문화도 국가 단위의 정체성만큼이나 부족주의적 정체성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걸프 왕정인 UAE의 경우 7개의 토후 (Emirates) 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다. 물론 연방 (중앙) 정부의 권한과 주권은 절대적 성격을 갖지만, 지방별로 부족의 전통과 특성을 살리고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걸프 아랍국가들의 경우 행정구역상 ‘주’ 단위의 유력 부족의 영향력은 나름 강하게 작동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지방정부는 사우디, UAE 등의 ‘주’단위 부족 공동체와의 접점마련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들과의 협력은 거대 산업이 아니라, 주로 농업 협력 (메가 팜 프로젝트), 기술 협력 및 인적 교류, 의료 협력, 대한 투자 등의 중간규모 단위의 산업을 독려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 각 지방정부의 특성에 맞는 문화, 전통 등을 걸프 현지에 적극 소개하는 프로젝트도 고려해 봄직 하다.

 

중동 전역의 혼돈 상태에서 국가와 국가간의 전통적 협력은 기존 수준을 유지하되, 오히려 지방정부간의 협력과 교류확대를 추구하면 어떨까? 지방정부간 교류를 통해 중동에 편재한 전반적인 안보 불안정성을 상쇄할 수 있는 작은 틈들을 여러 곳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